▶ 주소 : 강원도 둔내면 우용리 449-3번지
▶ 당산소류지 유래
조선중기 1600여년 경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에 빠져 부모님과 함께 북관 (함경북도 마천령산맥 북쪽)을 떠돌며 생활하던 중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실의에 빠진 그는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둔내면 우용리에 터를 잡고 아들 셋을 낳아 살아가게 되었다.
허나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당시 지배층이던 사람에 의하여 축출되고 인조가 왕으로 등극하여 친명배청 정책을 펼쳤으나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인조가 친청정책으로 전환하자 이에 의분을 느낀 이인거는 세아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으나 원주목사 홍보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저잣거리에서 참수를 당하게 된다.
그에게는 명마가 한마리 있었는데 주인이 세아들과 함께 참수된 것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말은 우용리 일대를 떠돌다 이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마을 사람들을 통하여 내리 전해 온다.
▶ 이인거[ 李仁居 ]
- 생애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명종대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이추(李樞)의 손자이다. 광해군대에 서울에서 횡성으로 이사한 뒤에 스스로 경작을 통해 자급하는 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1624년(인조 4) 2월에는 국정 운영과 관련된 10여 개 조항을 상소하였는데, 이로 인해 같은 해 4월에는 세자익위사 익찬(翊贊)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직후에 조정에서 후금과 화친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거는 변란 이전 충청도 제천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유희분(柳希奮)의 조카 유효립(柳孝立) 등 대북(大北) 잔여 세력들과 교류하며 광해군의 복립을 도모하였다.
- 활동사항
1627년(인조 5) 10월에 횡성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이 이인거가 변란을 도모했음을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에 따르면, 이인거는 같은 해 9월 27일 강원감사에게 자신이 의병을 일으켜 후금과 화친을 주도한 인물을 처단하고 오랑캐를 토벌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9일 군사를 모은 뒤에 횡성현에 보관된 군기를 탈취하고는 스스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였다는 것이다.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예방 차원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에 은밀하게 하유하는 한편, 신경인(申景禋)을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포수 7백 명을 거느리고 양주(楊州)로 가게 하였다. 또한 승전색과 선전관을 파견해 이인거 집안의 문서를 수색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0월 1일 이인거와 3부자, 그리고 군인 17명을 붙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10월 5일 체포된 이인거 등에 대한 공초가 진행되어 관련자들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변란의 토벌에 공을 세운 홍보(洪寶) 등은 소무공신(昭武功臣)에 책록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이인거 [李仁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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