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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일상

조선 중기 여성 시인, 허난설헌의 삶을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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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蘭雪軒)의 본명은 허초희로 난설헌은 스스로 지은호이다.

8세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지어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주옥같은 시들을 남겼다.

그녀의 삶은 시집가게 되는 15세 전과 후로 나뉘게 되는데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도 여식에게 글을 가르치길 꺼려하였다. 하지만 당대 훌륭한 문장가로 알려진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식 교육을 하였고 허난설현도 이런 아버지의 교육에 따라 글을 익히고, 더불어 재능까지 더하여지니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둘째오빠 허봉은 허난설헌에게 큰힘이되었다.

그는 막내 허균과 함께 시인 이달에게 글을 배울 수 있도록 함은 물론 시집간후에도 책과 문방구를 보내며 훌륭한 재능을 응원 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여자에게 글을 배우고, 시를 짓는 다는 것은 칭찬보다는 비판의 시선이 많았다. 조선중기의 허난설헌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이라 여겨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허나설현의 삶은 15세에 시집간 후 불행은 시작됐다.

 

 

 

하지만 이모든 슬픔또한 허난설헌은 시를 통해 예술로 승화 시켰다.

삶에대한 의욕을 상실하게된 허난설헌은 세가지 한을 말한다.

'첫째는 넓고넓은 세상중 조선에 태어난것,

둘째는 여자로 태어난것,

셋째는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된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글을쓰며 본인처럼 불행해지는 여인들이 없도록 자신의 시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라하였다. 허난설헌은 27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생을마쳤다.

유언에 의해 평생 집피한 어마어마한 양의 허난설헌의 시들은 불태우라고 하였고, 안타깝게 대부분의 작품들이 태워 없어졌다. 하지만 동생 허균에 의해 그녀의 일부 작품들이 중국, 일본 등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허난설현의 존재도 함께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은 누나의 작품들을 태우기 아까워 시들과 집안에 남겨져 있던 것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만들었다.

허난설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종하지 못했다.

시대를 앞서 나가는 자들이 겪어야만 하는 험난한 비난을 그녀 역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시대를 앞서 나간다는 것은 그 사회의 저항을 불러오게 마련이니, 난설헌의 삶 역시 평온하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 그녀에 대한 조선 문인들의 폄하와 비난은 시대를 앞서 나간다는 일이 얼마나 외로운 투쟁일 수밖에 없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유언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허난설헌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녀의 시와 삶은 위작과 표절로 매도되고, 방탕한 표절자라고 비난받았다.

이미 4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설헌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으니, 그녀의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허난설현의 이름을 들어보고 그녀의 작품을 접하였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한 많은 삶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개인으로서 짊어져야했던 시대적, 사상적 저항과 아픔에 대해서 이제는 우리가 먼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노력과 관심을 갖아보길 희망한다.

 

 

 

조선중기 천재 여성시인 허난설헌

조선은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고려시대 비교적 분방하던 여성들의 삶은 가부장 중심의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이념체계 안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점차로 위축되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집안을 지키고 후세를 낳아 기르는 역할만을 맡아 이것에 순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한 속에서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시를 쓰고 이를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기에 남성 중심의 가치체계가 확고해지던 조선중기, 허난설헌이라는 여성시인의 등장과 그 삶의 궤적은 그녀의 천재성과 함께 당시 여성들의 고통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허난설헌의 존재가 독특한 것은 그녀가 사대부가의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곧게 그녀가 창작한 시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데 있다. 허난설헌은 왜곡된 형태이긴 하나 제한적으로 사회활동이 자유로워 문재를 뽐내는 것이 가능하던 황진이 같은 기생도 아니었고,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같은 훌륭한 자식을 길러낸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신사임당처럼 부덕을 상징하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시로서 그 이름을 남겼고 훗날 그녀의 시는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지식인 문인들에게 격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애송되었다.

 

중국과 일본까지 알려진 허난설헌의 시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시는 족히 방 한 칸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시집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태웠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은 찬란한 천재성을 가진 누이의 작품들이 불꽃 속에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가 친정 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다.

1606년 허균은 그 시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에게 일람하게 하였다. 당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 매우 경탄하였다. 그리고 이를 중국에 가져가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다. 그녀의 시는 일약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중국의 문인들이 앞을 다투어 그녀의 시를 격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애송되던 허난설헌의 시는 18세기에 가서 동래에 무역차 나온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시는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난설헌의 시는 조선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였다. 다만, 중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시들 속에 중국의 당시를 참고한 듯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난설헌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그녀의 시집이 동생 허균에 의해 간행된 만큼 편집에 있어서 일부는 허균의 생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중기,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뛰어남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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