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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일상

다산 정약용 유적지 기념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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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계절에 어디로 드라이브를 떠나볼가 여기저기, 이곳저곳 찾아보던 중 남양주에 좋은 장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정약용 유적지 기념관'.

팔당호를 보며 드라이브도 즐길 수 있고, 산과 강을 함께 만끽할 수도 있고, 목민심서와 실학사상, 수원 화성 설계 등으로 우리 역사에 빛나는 위인인 정약용 선생님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코로나로 인해 유적지 및 기념관의 내부는 입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외부에 전시되어 있는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랬습니다.

비록 내부의 전시관은 보지 못하였지만 정약용 선생님이 후손들에게 남겨주신 여러 학문과 유산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한적인 견학이었지만 우리나라의 위대한 위인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다음에 입장이 가능할 때에 다시 한 번 찾아 오겠다는 다짐으로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정약용 선생 (1762~1836)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7호)

정약용 선생은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의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아버지 나주정씨 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의 후손)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셨다. 이곳 마현(마재)마을은 선생이 태어나시고 묻히신 곳이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과 동복형인 약전·약종 그리고 누이(매형이 이승훈)가 계셨다.

서울에서의 관직생활(1783~1800)과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1801~1818)을 제외 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셨다.


선생은 반계 유형원·성호 이익 선생의 뒤를 이어 조선 시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분으로 조선후기 개화사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문도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로 대표되는 500여권의 경집과 문집을 저술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의 화성을 설계하셨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구를 제작하셨으며 마과회통 등의 의학서적도 남기셨다.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수기안인(脩己安人)」 즉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현재 국립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로비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는데 '한국 최대의 사회과학자'라고 적혀 있다.

독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몇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깨달은 바가 무척 많은데 마구잡이로 그냥 읽어 버리기만 하는 것은 허공에 천번 백번을 읽어도 오히려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릇 독서할 때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한가지 책을 읽더라도 수백가지의 책을 엿보는 것이다.


학유에게 부치노라, 1808년 겨울 다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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