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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야기

상기하자! 잊지 말자! 6.25 전쟁의 아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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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삼팔선 이남 땅이 평화의 잠들고 있던 일요일 새벽.

북괴 공산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해 왔습니다.

남침 사흘만인 6월28일 서울은 짓밟혔습니다.

이때 우리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음은 물론, 치안유지에 필요한 10만 미만의 국군이 있었는데 반해, 북괴는 탱크 242대 등 중무장한 20만 병력으로 남침해 왔습니다.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아닌 밤중에 도적을 만난 서울 시민들은 허겁지겁 피난을 갔습니다. 집과 재산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붉은 무리의 탱크는 후퇴하는 국군을 쫓아 한강을 건너 쳐내려갔습니다.

붉은 이리 때에 짓밟힌 서울.

한강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미처 피난 못간 시민들은 강제노동의 죽을 고생을 하고, 6.25 이전에 공산당을 거부한 자유민주의 지식인들이나 종교인들은 반동 분자라 해서 인민재판이라는 허울 속에 무차별 학살 당했습니다.

당시 무방비 상태에 온 남한 땅은 경상도 땅 일부를 제외하고, 무참하게 유린데 갔습니다. 한 달 만에 놈들은 대구 북쪽까지 쳐내려왔고, 피난민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몰려 들었습니다.

여기는 포항.

아군의 낙동강 방어선 안에 있던 동해안에 이곳 포항으로 공산군은 이른바 8월 총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해수욕장이던 이 해변에서 피난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습니다.

이곳은 지금 포항 종합 제철이 들어선 자리입니다.

여기는 서울의 용산역 일대, 그때의 염춘교 굴다리.

그해 9월 아군은 서울을 수복했으나 서울은 거의 폐허가 돼 있었습니다.

 

그 해 압록강까지 북진한 아군은 중공군을 만나다시 후퇴를 했고, 해가 바뀐 1951년 1월 4일.

또다시 서울을 비우고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한만은 1.4후퇴.

6.25 직전 설마 북쪽 공산당이 쳐내려 오겠느냐면서 무방비 상태로 자유만을 외치다가 당한 비극 앞에 사람들은 울며 불며 한강을 건넜습니다.

여기는 당시 영등포역.

무턱대고 남쪽으로 가는 피난열차에 오른 사람들 짐짝처럼 포개지고 또 포개졌습니다. 이름도 서러운 일사후퇴에 추위에 떠는 아기를 체온으로 감싸주는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식을 기관차에 매달고가는 아버지의 마음.

눈물조차 메마른 피난 길, 오직 살아야 한다는 한 가닥 몸부림 속에 기차는 떠나갔습니다.

여기는 그 당시의 흥남부두.

해방 이후 줄곧 공산학정에 시달리든 20여만 북한 동포들이 피난 길에 올랐습니다. 난리통 부모의 손을 놓쳐 버린 어린 형제 부모는 아이를 찾고, 아이들은 어버이를 찾다가 울면서 돌아서야 했던 눈물의 뱃길.

그 해 겨울은 유별나게 춥고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남의 힘만 믿고 잘사는 남의 나라 흉내만 내면서 자유만을 누리기에 바빴던 그 말 많던 애국자들은 어디로 가고 말없이 살아온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가시밭길을 가야만 했는가.

삼팔선을 100리 길 지척에 두고도이 땅에 전쟁은 결코 없다든 무책임한 그 당시 지도층 때문에 착한 국민들은 이렇게 날벼락을 당했던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이 어린이들.

나라의 정세를 그릇 판단한 어른들의 잘못 철없는 아이들에게 이렇게도 가슴 아픈 상처를 새겨 줬던 것입니다.

지겨웠던 피난 생활.

아이들은 피난 학교에 이렇게 모였습니다. 그러나 책상도 걸상도 없었습니다. 책조차 없이 뙤약볕 아래서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며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또 나무 그늘 아래서 배우기도 했습니다.

피난 당시 대구의 고려대학교.

대학은 판잣집이나 천막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에 이화여자대학교.

나라의 안전 보장 없이는 배움 그 자체가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책가방 대신 총대를 메고 싸웠던가 나라를 지키겠다고 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학생들, 그리고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학교를 찾아온 학우들.

 

 

말도 많고 수도 많던 그 숱한 애국자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여기 젊은이들만이 애써 싸우다 피를 쏟고, 이렇게 몸 다쳐 누워 있는 것인지 떳떳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눈이 가는 곳마다 폐허뿐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가 약 20만, 남편을 잃은 여인은 무려 40여 만, 공산당에 끌려갔거나 학살된 사람이 근 30만에 이르렀습니다. 이 참혹한 땅 위에 이름 없는 죽음들이 산을 이루었습니다. 혈육을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오혈과 통곡 산도 울고 강도 울었습니다

6.25는 우리에게 무방비 상태의 자유는 침략과 압제를 스스로 불러들이며 힘이 없는 정의는 불의의 노예가 된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 휴전선에 땅굴을 파내려오면서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는 북한 괴뢰들 우리는 이 6.25의 폐허를 되돌아보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힘을 모아 내 조국 내 겨레를 지켜 나가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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